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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수험생에서 보호자가 되기까지
열여덟, 수험생에서 보호자가 되기까지
수능 D-100, 민서는 다른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수능 D-100, 민서는 다른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2024.11.14
2024.11.14
Editor 햇살한줌
[마음 온(溫)에어]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로 마주하는 우리 주변의 진실, 따뜻한 마음이 모여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때론 어른보다 더 어른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 있어."
영화 《우리들》의 이 대사처럼, 열여덟 살 민서(가명)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D-100 화이팅!", "불태워보자 마지막 100일!"
교실 뒤편의 카운트다운 달력 앞에서 친구들이 파이팅을 외치던 그때, 민서의 휴대폰 스케줄러에는 다른 숫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항생제 투여 D-21'
'다음 알바비 D-12'
'치료비 납부 D-7'
멈춰버린 일상, 다시 이어진 인연
"9월 모의고사 성적이 많이 올랐어요. 담임 선생님이 지원 가능한 대학들을 적어 주시던 중이었죠."
그날은 평범한 하루였습니다. 성적표를 받아 든 민서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번졌습니다. 하지만 그때 걸려온 낯선 전화 한 통이 모든 카운트다운을 멈추게 했습니다.
"환자분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로 계속 연락을 시도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으셔서... 마지막으로 걸어본 번호가 학생 것이었어요..."
12년간 자동차공업소에서 일용직으로 일해 온 장철호(가명) 씨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져 받은 담낭 수술은 패혈증이라는 예상치 못한 합병증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어요. 12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병원에 가보니..."
민서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습니다. 작업장 한켠에서 줄곧 홀로 지내온 아버지. 민서는 아버지의 휴대폰 연락처 목록 끝에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남아 있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첫째 언니와는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어머니는 '이제 와서 내가 왜?'라며 연락을 끊었습니다.
결국 당시 고3이던 둘째 딸 민서가 아버지 곁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아빠가 제 번호를 지우지 않으셨다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이제는 제가 그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았어요."
새로운 시간, 두 개의 카운트다운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선생님께서 많이 말리셨어요. '지금 성적이면 원하는 대학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선택을 해야 했어요."
민서의 하루는 새로운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됩니다. 오전 7시 아버지 약 복용, 오후 3시 링거 교체, 밤 11시 마지막 체온 체크까지... 오전에는 아버지 간호를,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합니다.
"친구들이 수능까지 남은 날짜를 세고 있을 때, 저는 아빠가 깨어나실 날만 세고 있었어요. 아버지와 공부 모두 소중했기에,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켜나가고 싶었죠."
주방, 서빙, 청소로 이어지는 긴 일과 속에서도 민서는 대학 진학의 꿈을 놓지 않았습니다. 병실 의자는 임시 독서실이 되었고, 메모지 뒷면은 수학 공식을 정리하는 노트가 되었습니다. 막차 버스에서는 참고서를 보다 잠들기 일쑤였지만, 그마저도 소중한 공부 시간이었습니다.
한 달 70만 원의 알바비는 천만 원이 넘는 치료비 앞에서 너무나 작은 숫자였습니다. 하지만 민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깨어나시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아빠, 저 곧 대학생 돼요' 라고요."
대한교육학회의 '2023 청소년 가족 부양자 실태조사'는 충격적인 현실을 보여줍니다. 전국적으로 5천 명의 10대들이 부모나 형제를 돌보며 자신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있습니다. 이 중 60%가 편부모 가정의 자녀들입니다.
희망을 향한 새로운 시작
다행히 민서의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정부의 긴급 의료비지원으로 970만 원이 해결되었고, 이랜드복지재단의 'SOS 위고' 프로그램이 남은 치료비를 지원하면서 민서는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To. 이랜드복지재단
안녕하세요? 장철호 환자 보호자(딸)입니다.
우선 병원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까마득하고 곤란했던 상황에서 지원해 주신 병원비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미성년자 신분으로 혼자 보호자를 맡아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치료비 지원 덕에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2024년 새해가 밝았는데, 항상 행복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기초생활 수급자 선정 후에는 의료급여 적용을 받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회복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후에는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보호자로서 열심히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보호자 민서 올림
수능 전날 밤, 수험생들의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무렵 아버지는 마침내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민서야... 미안하다..."
그 한마디에 홀로 버텨온 시간을 위로받는 듯했습니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볼 수 없었지만, 휴대폰에 남아있던 그 번호처럼 서로를 향한 마음도 그대로였습니다.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어갈 무렵, 민서는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습니다.
"우리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돕고 싶어요.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아이들 곁에 있고 싶어요."
민서에게 전해진 따뜻한 손길처럼, 우리의 작은 관심이 누군가의 새로운 카운트다운이 될 수 있습니다.
"혼자가 아니란 걸 알게 됐을 때, 처음으로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제가 다른 누군가의 희망의 시간을 함께 세어가고 싶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민서의 이야기가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